Page 9 - 2019 KSNE YEAR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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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잉글랜드 한국학교 (1975~2019)                        3



                         뉴잉글랜드 한국학교 성장기 (1999. 9-2005. 6)



                                  뉴잉글랜드 한국학교 개교 30 주년



                                                                                                남 일 교장 (제 5 대)


                                            큰 아이 슬기가 학교에 갈 나이가 되어 이 지역에서 가장 좋다는
                                     한국 학교에 보내기 위해 거의 한 시간 정도를 운전해야 하고 수업을
                                     마치기까지  세  시간  이상을  기다려야  하는  고충을  감내하고  당시
                                     렉싱턴  소재  성요한  감리교회  건물에  있던  뉴잉글랜드  한국학교에
                                     나가게 되었다. 1992 년 아내가 먼저 교사로 봉사하게 되었고 나는 1 년
                                     후  이중  언어반이  생기게  되면서  노루반을  처음  맡게  되었는데,  한국
                                     학교에서 선생님들이 단 몇 시간을 가르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과
                                     정성을 쏟아야 하는지 몸소 체험하게 되었다.

           1997 년에는  교무주임을  맡은  후  첫  여름  방학이라고  생각된다.  그  당시  미국  전역에서  학교
           웹페이지를  가진  학교는  거의  없었으나  학교의  행정과  기타  정보를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전하기 위한 목적으로 방학 기간 동안 우리 학교 홈페이지를 만들게 되었다. 그 후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여러 번 단장하고 바꾸면서 잘 운영하게 되었다.

           1999 년 5 월초 지난 6 년간 학교를 훌륭히 성장시킨 황성미 전임 교장 선생님이 개인 사정에
           의해 봄 학기를 끝으로 사임하시는 바람에 나는 개인 생활 뿐 아니라 가족들과의 시간도 모두
           학교를  위해  담보로  잡혀야  하는  ‘무한정의  봉사’가  요구되는  뉴잉글랜드  한국학교의  5 대
           교장직 제의를 받게 되었다. 나는 먼저 가족회의를 열고 다른 사람들의 의사를 들어보기로 했다.
           갈 길이 험난한 교장직을 뒤에서 이해하고 도와야 함을 하는 아내는 쉽게 돕겠다는 말을 하지
           못했으나,  곧  이것도  하나님이  우리  가족에게  봉사의  길로  예비하시는  일이라는  것으로  이해
           하고 수락하게 되었다.

           길지 않은 인수인계 기간을 거쳐 교장직을 맡았으나, 봉사의 일이란 것이 정말 어렵다는 것을
           재차 실감하는 나날이 계속되었다. 다행히 9 월 학기에는 학생 수가 더 늘어나게 되었으나, 그
           다음 해 2000 년에는 우리 학교가 임대하여 사용하고 있던 Clarke 중학교 측에서는 내부 수리를
           하게  됨에  따라  6 월  종강식이  끝난  후에는  2 년  동안  학교를  사용하지  못한다는  청천벽력
           (靑天霹靂)같은  통보를  받게  되었다.  작은  식구도  아니고  적지  않은  가정이  렉싱턴  주변에서
           오고 있던 상황으로 보면 정말 큰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당시 김기석 이사장은 긴급 이사회를 소집 School Building Such Committee 를 구성하고 Mr.
           Deakin 이사, 신동익 이사, 이경해 이사, 이상미 학부모회장 등으로 그 역사적인 대임을 맡기게
           되었고 3 월부터 5 월까지 나는 거의 매일 이 분들과 함께 주위 모든 학교 건물을 돌아다니며
           알아봤으나 이미 이 지역에 정치적인 힘을 갖고 있던 중국계 사회와 달리 지역 사회 의 발전에
           공헌함이 적은 우리 한인 사회의 한 한국 학교가 보스톤 중심지의 학교 건물을 쉽게 빌리기란
           하늘의  별따기처럼  어려웠다.  우리에게  선뜻  문을  열어  주는  학교를  구하지도  못했는데  학교
           건물을 비워줘야 할 시간은 점점 다가오고 있었으나 다행히 그 당시 본업을 접어두고 학교 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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